-딜링박스 태웅-
그 판 이후로 브루스는 근 두 시간 동안 계속 풀 배팅했다.
이제 사람들은 모두 브루스와 반대로 배팅하고 있었다.
카드는 희한하게도 브루스의 반대편으로만 떨어졌던 것이다.
자포자기한 브루스의 눈이 점차 초점을 잃었다.
브루스는 무슨 까닭인지 사람들과 반대로만 가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이기는 쪽과 반대로만 가고 있었다.
어느 순간부터인지 필립 최는 브루스와 엇갈려 이기는 쪽으로만 배팅하고 있었고,
사람들은 희희낙락거리며 필립 최를 따라 칩을 옮겼다.
누가 바카라를 쉬운 게임이라고 말했던가.
두 시간 후 브루스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일어났다.
마지막으로 배팅한 2백 달러마저 잃고 나자
더 이상 앉아 있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는 차마 떨어지지 않는 걸음을 옮기다 말고
필립 최의 뒤에 멈춰섰다.
필립 최 앞에 수북하게 쌓인 칩을 넋을 잃고
바라보는 브루스의 얼굴은 끝없는 회한과 절망으로 물들어 있었다.
필립 최는 가끔씩 그에게 시선을 던지며 고개를 흔들었다.
왜 그런 식으로 게임을 했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제스처였다.
브루스는 방으로 올라가고 싶었지만 이제 마지막이라는 생각이 들자
단 한 걸음도 떼어놓을 수 없었다.
그는 가끔 자신을 돌아보며 모든 것을 이해한다는 듯
고갯짓하는 필립 최와 시선이 마주칠 때마다
억지로 웃음을 지었다.
그것만이 절망에 빠진 브루스가 바깥 세계와 교신할 수 있는 유일한 신호였다.
이윽고 필립 최는 200만 달러나 불어난 칩
을 밀어내며 일어섰다.
좀 쉬어야겠어. 이 칩을 보관해 줘.
딜러들은 황송한 표정을 지으며 서둘러 필립 최의 칩을 세었다.
황송한 표정, 그것은 이긴 자에 대해 카지노 딜러들이 보이는 본능적인 모습이다.
브루스는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자신이
그런 대접을 받던 주인공이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그러나 지금은 어쩔 수 없는 패배자일 뿐이다.
패배자란 늘 비참하지만 카지노에서의 패배자만큼 처량한 존재도 없을 것이다.
사람들은 패배자의 내면적 갈등을 상상하면서 동정심과 복수심이
교차하는 눈길로 쳐다본다.
복수란 불과 얼마 전까지 온 판을 호령하며
빅 배팅을 해대던 화려함에 대한 비난인 것이다.
우린들 왜 그렇게 화려하게 쳐대고 싶지 않았겠는가.
그러나 마치 겁쟁이처럼 조심하면서 쩨쩨한 배팅으로 일관한 것은
바로 당신처럼 되지 않기 위해서였다라는
시선을 패배자에게 사정없이 쏘아대는 것이다.
브루스는 비록 사람들이 자신을 보고 안됐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지만
그 속에 담겨 있는 다른 의미를 너무도 잘 알았다.
그러나 필립 최는 달랐다.
브루스는 필립 최가 자신의 오기 섞인 배팅에 대해서
여러 번 지지를 해준 것과 아울러 자신을 바라보는 눈길에서도 어딘지 따스함을 느꼈다.
그 느낌은 카지노에서는 처음 대해보는 낯선 것이었다.
브루스는 카지노 호스트를 통해 필립 최가 진정한 도박사라는 것을 알아냈다.
그리고 기분에 따라서는 턱없는 짓을 하는 괴짜라는 사실도.
브루스는 무엇보다도 그가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다행으로 여겼다.
한국인에게는 자신도 할 얘기가 있었던 것이다.
브루스는 필립 최가 자리에서 일어나 움직이자 은밀히 뒤쫓았다.
그리고 필립 최가 엘리베이터를 타기 직전 간신히 말을 붙여볼 기회를 잡았다.
게임을 참 잘하시더군요.
필립 최는 브루스를 보자 무척 반가워하다가 이내 안쓰러워하는 표정을 지었다.
아까는 왜 그렇게 했소? 그렇게 흥분해서는 이길 수가 없잖아요.
고통스럽습니다. 저도 왜 그랬는지 모르겠어요.
참`…`….
필립 최가 안타까운 한숨을 남기고 엘리베이터를 타려 하자
브루스는 다급하게 그를 붙잡았다.
저어`…`….
…`…?
잠시 얘기 좀 할 수 있겠습니까?
무슨 얘기요?
필립 최의 목소리가 갑자기 건조해졌다.
브루스는 바뀌어버린 필립 최의 반응에 그만 용기를 잃고 말았다.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뭔데요?
어디 좀 앉아서 얘기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 식사를 하려던 참이오.
그럼 식사를 같이할 수 없겠습니까?
브루스는 필사적이었다.
어려운 말을 간신히 뱉어내는 브루스의 표정은 안쓰럽다 못해 처참할 정도였다.
식사를?
필립 최는 망설이는 듯하다가 대답했다.
음, 그럽시다.
필립 최는 앞장서서 중국 식당으로 갔다.
브루스는 자리를 잡고 앉아서 필립 최가 요리를 서너 가지 시킬 때까지
계속 자신이 어떻게 잃었는지,
얼마를 잃었는지에 대해 반복적으로 설명했다.
이런 브루스의 얘기를 필립 최는 지루한 표정 한번 짓지 않고 들어주었다.
요리가 나오고 술이 얼근해지자 브루스는 드디어 마음에 품고 있던 얘기를 꺼냈다.
언젠가 저는 2만 홍콩달러를 가지고 200만 홍콩달러를 딴 적이 있었습니다.
오호, 그래요?
아주 침착하게 했죠.
저는 그것을 잃으면 끝이라는 생각에 최저배팅으로 일관했습니다.
시간과의 싸움이었죠.
시간과의 싸움? 대단하군요.
바로 그게 게임에서 이기는 원칙이지.
어떻게 그런 원리를 깨달았소?
브루스는 용기를 냈다.
저는 꼭 따야만 할 때는 달라집니다.
절대로 아까와 같이 한번에 치거나 하지는 않죠.
그래야만 하오.
사실은 내일이면 집에서 돈을 부쳐올 텐데,
오늘 이렇게 허탈한 상태에서는 잠을 이루지 못할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런데
`…`….
말씀해 보시오.
2천 달러만 좀 빌려주시면 내일 갚아드리겠습니다.
브루스는 한번에 30만 홍콩 달러를 배팅하던 때와는 너무도 달라져 있었다.
단돈 2만 달러를 구걸하는 그의 모습을 한참 바라보던 필립 최는 표정을
냉랭하게 바꾸었다.
잘 아시겠지만 도박판에서는 절대로 돈을 빌려주거나 받는 법이 아니오.
운을 바꾸기 때문이지.
푹 쉬면서 기다렸다가 내일 돈이 오면 게임을 시작하시죠.
브루스는 애가 닳았다.
필립 최라는 인물은 손에 잡힐 만한 거리에 있는 듯하면서 아니었다.
그러나 여기서 물러설 수는 없었다.
그는 무릎이라도 꿇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으면서 매달렸다.
미안합니다. 너무 잘 알지만 워낙 사정이 다급해서`…`….
이제 브루스의 입에서는 집에서 돈을 부쳐온다는 등의
얘기는 더 이상 나오지 않았다.
잘생긴 모습에 어울리지 않게 비굴한 기색이 얼굴에 가득 찼다.
잘 아시겠지만 나는 프로요.
네, 잘 알고 있습니다.
카지노 호스트가 선생님이 어떤 분인지 알려주더군요.
필립 최는 잠시 브루스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브루스는 그의 시선을 받자 최대한 가련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평범한 사람들을 싫어하오.
뭔가 특별한 인간을 좋아하지.
알겠소? 브루스는 무슨 말인지 몰라 필립 최의 입에 시선을 모았다.
남들은 나를 괴짜라 부르지. 아무리 불쌍해도 평범한 인간을 돕지는 않소.
그들은 결국 거품처럼 사라져버리고 말기 때문이오.
나는 뭔가 좀 특별한 사람, 특별한 인생을 살아온 사람,
그런 사람이라면 가끔 도와주기도 하오.
브루스의 얼굴에 희미한 희망의 그림자가 스쳐갔다.
사실 저도 그렇게 평범하게 살아온 사람은 아닙니다.
그러나 필립 최는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래요?
네.
브루스의 얼굴에 초조한 기색이 떠올랐다.
어떻게 특별합니까?
혹시 한국 분이 아니십니까?
그렇소만`…`….
아, 잘되었군요.
사실 저도 한때 한국에서 근무했거든요.
무슨 근무를?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을 꼽자면 아마 도박일 것이다.
도박에서 모든 것을 잃은 사람은 필연적으로 자살을 생각하게 된다.
자살을 생각하는 사람이 무엇을 못하랴.
브루스는 무너져내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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